니커보커 트러스트의 몰락
불안은 곧 현실이 됐다. 1907년 10월 22일, 뉴욕의 대형 신탁회사 중 하나였던 니커보커 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 Company)에서 예금자들이 약 800만 달러를 한꺼번에 인출했고, 회사는 결국 영업을 중단했다. 당시는 오늘날의 연방준비제도(Fed) 같은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다. 예금 인출 사태를 멈출 '최종 대부자'가 제도적으로 없었다는 뜻이다.
70세 노장 뱅커의 결단
이 공백을 메운 것이 당시 70세였던 J.P. 모건(J.P. Morgan)이었다. 모건은 처음부터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을 통해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장부를 먼저 검토했고, 회사의 상태를 확인한 뒤 처음에는 구제를 거절했다.
하지만 위기가 다른 신탁회사와 증권시장 전체로 번지자, 모건은 뉴욕의 주요 금융인들을 자신의 자택으로 소집해 흔들리는 금융기관들을 함께 구제하도록 설득했다. 이후 그는 주요 금융·산업 기관들로부터 직접 현금을 모아, 이를 증권거래소의 대출 창구로 직접 전달해 어려움을 겪던 중개인(브로커)들을 지원했다. 정부 중앙은행이 오늘날 하는 유동성 공급 역할을, 한 개인 은행가가 인맥과 신용을 동원해 대신한 셈이다.
위기 이후: 니커보커의 재개와 회복
모건의 개입으로 단기적인 시장 신뢰는 회복됐지만, 정작 위기의 발단이 된 니커보커 트러스트 자체는 그해에 살아남지 못했다. 이 회사는 240만 달러의 신규 자본을 수혈받은 뒤에야 1908년 3월이 되어서야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모건의 구제가 '시스템 전체의 붕괴'는 막았지만, 개별 기관의 손실까지 모두 되돌리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이 사건이 남긴 것: 연방준비제도의 탄생
1907년 공황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따로 있다. 한 개인의 신용과 자산에 국가 금융 시스템의 존립이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 의회와 금융권에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은 통화 제도 개혁 논의에 불을 지폈고, 그 논의는 결국 1913년 12월 23일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에 서명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오늘날 미국의 중앙은행 시스템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렇게 한 개인 은행가가 2주간 짊어졌던 부담이 있었다.
J.P. 모건이라는 인물
J.P. 모건은 1837년에 태어나 1913년 3월 3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7년 공황보다 앞선 1901년, 그는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회사(Carnegie Steel)를 4억 8,000만 달러에 인수하는 거래를 성사시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스틸(U.S. Steel Corporation)을 출범시켰다. 이는 강철왕 카네기가 무일푼에서 부자가 된 결정적 3가지 습관에서 다룬 카네기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모건은 이 밖에도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등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기업들을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정리하며
1907년 금융공황은 '시스템을 지탱하는 것이 제도인가, 신뢰할 수 있는 개인인가'라는 질문을 미국 사회에 던진 사건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존 D. 록펠러처럼 개인의 부가 국가 경제에 영향을 미치던 '도금 시대(Gilded Age)'의 단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자산가들이 신탁 구조를 통해 자산을 관리하는 방식과 비교해보면, 개인의 신용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1907년의 시스템이 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참고 자료(Sources)